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버트 올트먼 (문단 편집) === 침체기인 80년대, 반등한 90년대 === 79년, 알트만의 이름값으로 미국의 [[폴 뉴먼]], 스페인의 페르난도 레이, 이탈리아의 [[비토리오 가스만]], 프랑스의 브리짓 포시, 스웨덴의 비비 앤더슨 등의 배우들이 각본도 읽지 않은 채 함께 한, 그리고 상당한 예산을 들인 SF영화 <퀸테트>(Quintet, 1979)가 흥행-비평 양쪽에서 대차게 말아먹었다.[* [[박찬욱]]의 책인 '박찬욱의 오마주'에서 참고.] 한편, 1980년에 알트만은 판권을 산 [[파라마운트]]와 [[디즈니]]가 제작한 [[뽀빠이]]를 연출했다. 이때 촬영지에서 제작진과 배우들이 술이나 약을 한다는 등의 구설수에 시달리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알트만은 제작자, 주연인 [[로빈 윌리암스]], 음악 감독과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켰으며, 심지어 로빈 윌리엄스는 영화 촬영 도중에도 감독과의 불화 때문에 떠나겠다는 말을 공공연히 했을 정도였다. 비록 영화는 그럭저럭 흥행을 거두었지만 제작사 측에서 기대했던 수치에 한참 못미치는 실망스러운 수치였고, 비평도 시원찮은 수준이었다. 자신이 제작한 영화들, 특히 <퀸테트>가 시원하게 망하면서 어려움을 겪은 알트만은 결국 자신의 제작사를 매각했다. 결정적으로 <뽀빠이>를 찍은 과정에서의 흘러나온 구설수는 더 이상 헐리우드가 알트만을 찾지 않게 만드는 구실이 되었다. 일례로 [[밀로스 포먼]]의 영화 <래그타임>(Ragtime, 1981)은 원래 알트만이 연출하기로 되어있었으나 시작하기 전에 짤리고 나중에 밀로스 포먼이 연출했다. 자신도 '전화를 해도 받질 않고, 여기저기에서 오던 연락들도 끊겨있었다'고 회상했을 정도로 커리어에 치명적이었다. 그 후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소규모 영화나 다큐멘터리, TV 드라마, 연극 연출 등에 열중했다. 이 시기 영화들 중엔 연극을 영화화한 작품이 많은데 (1982), (1984) 등이 그렇다. 이 영화들은 호평을 받긴 했지만, 80년대 알트만의 영화들은 비평적으로는 대체로 평작 수준이거나 망작도 많다. 80년대 후반으로 들어서며 1988년에 '자신이 했던 일 중 가장 창의적이고 독특했던 작품'라 평했던 [[모큐멘터리]] 드라마 [* 와 함께 [[크라이테리온 콜렉션]]를 통해 DVD로 나와있다.]를 통해 에미상 감독상을 받으며 반등의 기미를 보였다. 유럽에서 <빈센트 & 테오>(Vincent & Theo, 1990)를 만들고, 다시 헐리우드로 돌아온 알트만은 92년 <[[플레이어(영화)|플레이어]]>(The Player, 1992)를 통해 화려하게 재기하는데 성공했다. 비록 아카데미 시상식과 골든 글로브에서는 <[[용서받지 못한 자]]>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감독상을 내주기는 했으나, [[칸 영화제]],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수상했고, 골든 글로브에서는 코미디 부문 작품상을 수상하는 등 비평적으로 성공을 거두며 2차 전성기의 서막을 열게 되었다.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집을 직접 각색한 그 다음 작품인 <[[숏 컷]]>(Short Cuts, 1993)은 <플레이어>와 함께 후반기 알트만 영화의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하며 비평에서 성공을 거뒀다. LA 지역에 사는 22명의 인물을 약 3시간에 걸쳐 그려낸 이 영화는 알트만의 특징적인 연출 방식이 총집약된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영화의 구조와 상당부분 비견되는 영화가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매그놀리아]]>다.[* 영화 길이까지 동일할 정도로 대놓고 오마주했다.] <숏 컷>으로 알트만은 아카데미와 골든 글로브 감독상 후보에 올랐으며,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세 가지 색: 블루]]> (Three Colors: Blue, 1993)와 함께 공동으로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이후 [[마르첼로 마스트로야니]], [[소피아 로렌]] 등 유럽의 어마무시한 배우들을 끌어모아 만든 프랑스 파리 배경의 <패션쇼>(Pret-a-Porter, 1994)를 비롯해서, <캔자스 시티>(Kansas City, 1996), <진저브레드 맨>(The Gingerbread Man, 1998), <쿠키의 행운>(Cookie's Fortune. 1999), <닥터 T와 여인들>(Dr. T & the Women, 2000) 등 평작들을 계속 만들었다. 하지만 평범했던 이전의 행보를 만회라도 하려는 듯이 <[[고스포드 파크]]>(Gosford Park, 2001)를 연출하며 알트만은 다시 한번 찬사를 받았다. 앞선 골든 글로브에서 <[[인공지능|AI]]>의 스티븐 스필버그,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데이비드 린치,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의 피터 잭슨, <[[물랑 루즈(영화)|물랑 루즈]]>의 바즈 루어만을 제치고 감독상을 수상하며 아카데미 무관을 깰 절호의 기회로 평가받았지만, 정작 아카데미 감독상, 작품상은 둘 다 [[뷰티풀 마인드]]의 론 하워드에게 내주면서 무관을 깨지는 못했다.[* 감독상 수상자가 발표된 이후에 《멀홀랜드 드라이브》로 감독상 후보에 올랐던 [[데이비드 린치]]와 알트만이 서로 위로해주는 모습을 보여 소소한 웃음을 주기도 했다. 워낙 당시 후보들이 쟁쟁해서 론 하워드와 <뷰티풀 마인드>의 감독상과 작품상 수상은 다소 까인다. 이를 두고 <고스포드 파크>로 각본상을 받았던 각본가 줄리안 펠로우즈는 당시 알트만이 전쟁에 반대하고, 부시 정부와 각을 세웠기 때문에 주지않았던 것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이 영화는 여러 평론가들에게도 '걸작'이라는 극찬을 받았고, 흥행도 <[[M.A.S.H.]]> 다음으로 가장 큰 성적을 기록하며 성공했다. <고스포드 파크> 이후 영화 [[스크림 시리즈]]의 히로인인 [[니브 캠벨]]이 제작, 주연을 맡은 발레 영화인 <더 컴퍼니>(The Company, 2003)를 연출했다. 캠벨은 어릴때 발레리나로 활동했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를 각본가인 바바라 터너와 같이 각본으로 쓰면서 터너에게 알트만 감독 스타일에 맞는 각본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은 발레를 잘 모른다'며 영화의 연출을 한사코 거부하던 알트만을 직접 찾아가 수십 번을 조른 끝에 겨우 허락을 받아내서 찍었다고 한다. 조연인 [[제임스 프랭코]]나 [[말콤 맥도웰]]도 알트만과 작업해보고 싶다는 이유로 출연했다고 한다. 그리고 유작인 <프레리 홈 컴패니언>(A Prairie Home Companion, 2006)을 연출한다. 당시 제작사에서는 80살의 나이였던 알트만이 잘못될 경우를 대비해 예비 감독을 세울 것을 요청[* 이게 처음은 아니어서 <고스포드 파크>를 촬영할 때도 제작사에서는 예비 감독으로 영화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더 퀸>을 연출한 영국 출신의 감독 스티븐 프리어스를 대기시켰다.]했고, 알트만은 자신이 아끼던 감독 [[폴 토머스 앤더슨]][* 앤더슨은 후에 자신이 [[데어 윌 비 블러드]]를 편집하던 중 사망한 알트만에게 영화를 헌정했다.]을 대리로 세웠다. 물론 직접 촬영을 끝까지 마쳐서 대리 할 일은 없었고, 대신 앤더슨은 촬영장에서 같이 참관을 하면서 거동이 불편한 알트만의 지시를 대신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프레리 홈 컴패니언>이 완성되고, 2006년 개봉을 앞둘 즈음에 알트만은 아카데미로부터 [[http://www.youtube.com/watch?v=rcp8xjaFfb8|평생공로상]]을 받았다. 이 자리에서 90년대 중반에 30대 여성의 심장을 이식받은 사실을 처음으로 밝히면서, 아직 40년은 거뜬하기에 이 공로상이 너무 이른것 아니냐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실제로 사망 전까지 여러 작품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 소망은 실현되지 못했고, 결국 2006년 11월 [[백혈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인해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